Yunju, a high school student, went to a Korean art exhibition.

고등학생인 윤주는 한국 미술 전시회에 갔습니다.

She wrote a report about her experience to share with her class.

그녀는 그녀의 반친구들과 공유하기 위하여 그녀의 경험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Last week, I visited an exhibition of artwork and ancient items selected from the Kansong Art Museum’s collection.

지난주, 저는 간송 미술관 소장품에서 선별된 미술품과 골동품 전시회에 방문하였습니다.

The exhibition included information about the man who gathered all of the artwork displayed there.

그 전시회는 그 곳에 전시되어진 모든 미술품을 모은 남자에 대한 정보를 포함하였습니다.

His name was Jeon Hyeongpil, but he is better known by his pen name, Kansong.

그의 이름은 전형필이였으나 그는 필명인 간송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He was born into a rich family in 1906 and lived through the Japanese occupation of Korea.

그는 1906년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한국의 일제 강점기를 겪었습니다.

At the age of 24, he inherited a massive fortune.

24세에, 그는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았습니다.

After carefully thinking about what he could do for his country, he decided to use the money to protect Korea’s cultural heritage from the Japanese.

조국을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심사숙고한 이후, 그는 일본으로부터 한국의 문화유산을 보호하는 곳에 그 돈을 쓰기로 결심했습니다.

This decision was greatly influenced by his mentor, Oh Sechang, who was an independence activist and had keen insight into Korean art.

이 결정은 그의 스승인 오세창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았는데, 오세창은 독립운동가이자 한국 미술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With Oh’s guidance and his own convictions, Kansong devoted most of his fortune to acquiring old books, paintings, and other works of art.

오세창의 지도와 그 자신의 강한 신념으로, 간송은 그의 재산의 대부분을 오래된 책들, 그림들, 그리고 다른 미술품들을 얻는데 바쳤습니다.

He considered these items the pride of the nation and believed they represented the national spirit.

그는 이러한 물품들을 나라의 긍지로 여겼고 그것들이 민족혼을 나타낸다고 믿었습니다.

Without his actions, they would have been destroyed or taken overseas.

그의 행동이 없었더라면, 그것들은 파괴되거나 해외로 반출되었을 것입니다.

As soon as I walked in, I could not help but admire some ink-andwater paintings by Jeong Seon, a famous Korean artist also known as Gyeomjae.

저는 들어가자마자, 겸재로도 알려진 유명한 한국화가 정선이 그린 수묵화 몇 개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These paintings were kept in an album called the Haeak jeonsincheop.

이 그림들은 "해악전신첩" 이라고 불리는 화첩에 들어 있었습니다.

They depict the beautiful scenery of Geumgangsan Mountain and its surrounding areas.

그것들은 금강산과 주변 지역의 아름다운 경치를 묘사합니다.

The way Gyeomjae painted the mountains, rivers, and valleys makes them look very inviting.

겸재가 산과 강,계곡을 그린 방식은 그것들을 매우 매력적으로 보이게 합니다.

I was shocked when the museum tour guide said that the album was almost burned as kindling.

저는 미술관의 안내원이 그 화첩이 불쏘시개로 태워질 뻔했다고 말했을 때 충격을 받았습니다.

Fortunately, it was rescued at the last minute and later purchased by Kansong.

다행히, 그것은 마지막 순간에 구해졌고 나중에 간송에 의해 매입되어졌습니다.

Knowing that these beautiful paintings were nearly turned to ashes made me feel very sad.

이 아름다운 그림들이 재가 될 뻔했다는 것을 알고 저는 너무나 슬펐습니다.

I am thankful that these paintings are still around so that future generations can also appreciate them.

저는 미래세대 또한 이 그림들을 감상할 수 있게 그것들이 여전히 주변에 존재한다는 점에 감사합니다.

Finally, I saw the one item in the museum that I will never forget – an original copy of the Hunminjeongeum Haerye.

마지막으로 저는 미술관에서 절대 잊을 수 없는 한 물품을 보았습니다 ᅳ 바로 "훈민 정음 해례본" 의 원본이였습니다.

This ancient book was written in 1446, and it explains the ideas and principles behind the creation of Hangeul, the writing system of the Korean language.

이 오래된 책은 1446년에 쓰였으며 그것은 한국어의 문자 체계인 한글 창제의 바탕이 되는 발상과 원리를 설명합니다.

 It was found in Andong in 1940.

그것은 1940년에 안동에서 발견되었습니다.

At that time, however, Korea was still occupied by Japan.

하지만, 그 당시에 한국은 여전히 일본에 의해 점령된 상태였습니다.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intended to get rid of the Korean language.

일본 식민 정부는 한국어를 없애버리려고 하였습니다.

Schools were forbidden to teach lessons in Korean, and scholars who studied Korean were arrested.

학교들은 한국어로 수업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한국어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체포 되었습니다.

From the moment he heard that the Hunminjeongeum Haerye had been discovered, Kansong couldn’t stop thinking about it.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되었다는 것을 들은 순간부터, 간송은 그것에 대한 생각을 그만 둘 수 없었습니다.

He knew he had to protect it at all costs.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것을 지켜야만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After years of waiting, he was finally able to obtain the book.

수년간의 기다림 이후, 그는 마침내 그 책 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He purchased it at ten times the price the owner was asking and carefully hid it in his house.

그는 그것을 소유자가 요구한 가격의 10배에 샀고, 그것을 자신의 집에 조심스럽게 숨겼습니다.

When the Japanese were finally defeated, he was able to share it with the rest of Korea.

마침내 일본이 패하자, 그는 그것을 한국 국민들과 공유할 수 있었습니다.

The guide said that the Hunminjeongeum Haerye is the museum’s most precious treasure.

그 안내원은 "훈민정음 해례본" 이 미술관의 가장 소중한 보물이라고 말했습니다.

Without it, the origins and fundamentals of Hangeul would have been lost to history.

그것이 없었더다면, 한글의 기원과 기본 원칙은 전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It has since been designated a National Treasure of Korea and included in the UNESCO Memory of the World Register.

그것은 이후 한국의 국보로 지정되었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포함되었습니다. 

Looking at the ancient book, I could feel Kansong’s strong commitment to preserving Korean history

그 오래된 책을 보면서, 저는 한국 역사를 보호하려는 간송의 강한 의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Standing in the middle of the exhibition hall, surrounded by Korean art, I could not stop thinking about Kansong.

한국 미술품에 둘러싸여 전시장 한가운데에 서서, 저는 간송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He was an amazing person.

그는 놀라운 사람이었습니다.

He did not collect art for his personal enjoyment.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즐거움을 위해 미술품을 수집하지 않았습니다.

He did it to protect Korea’s cultural identity during the harsh Japanese colonial period.

그는 혹독한 일제강점기 동안 한국의 문화적 독자성을 보호하기 위해 그 일을 했습니다.

After Korea regained its independence, he stopped collecting art, as he knew it would safely remain in Korea.

한국이 독립을 되찾은 후에, 그는 미술품 수집하는 것을 관두었는데, 그는 미술품이 안전하게 한국에 남아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During our country’s worst time, a single man was able to defend Korea’s national spirit and pride.

우리나라의 가장 힘든시기 동안 한 남자가 홀로 한국의 민족혼과 자부심을 지켜냈습니다.

Thanks to him, we are still able to experience an essential part of Korean culture today.

그 덕분에, 우리는 오늘날 한국 문화에서 대단히 중요한 부분을 여전히 경험할 수 있습니다.

Founded in 1938, the Kansong Art Museum was Korea’s first private museum.

1938년에 설립된 간송 미술관은 한국 최초의 사립 미술관입니다.

When Kansong built it, he named it Bohwagak.

간송이 그것을 지었을 때, 그는 그것을 보화각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He used the building as a place to store all of the important cultural items he had collected over the years.

그는 그 건물을 그가 수년 동안 수집한 모든 중요한 문화적 물품들을 보관하는 장소로 사용하였습니다.

Kansong died in 1962, and Bohwagak was renamed the Kansong Art Museum in 1966.

간송은 1962년에 사망했고, 보화각은 1966년에 간송 미술관으로 개명되었습니다.

It now holds about 5,000 items, including 12 Korean National Treasures.

그것은 현재 한국의 국보 12점을 포함하여 대략 5,000점의 물품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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